『너는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이 다음에 화가가 되면 잘될 거다』 오늘날 동양화가 金炳
宗씨를 있게 한 칭찬 한마디이다. 全北 남원 송정초등 학교 4학년 때 정문자 선생님은 그
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해 준 분이었다. 미술시간에 金炳宗씨의 그림을 지켜본 선생님이 해
준 그 말은 단순히 칭찬을 받았다는 기쁨 그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의 진로
를 결정하기 위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金炳宗씨에게 정문자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한
줄기 빛처럼 강하게 삶의 좌표가 되었다. 당시 조언자가 없는 시골에서 예술 분야를 강력
히 추천해준 선생님의 안목과 사랑은 서울대 美大(미대) 교수가 된 지금까지 정신적 자신
감을 불어 넣었다고 한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 등에서 노래, 연극, 그림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는 고양공립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노래 , 연극 등에서 재능을 발휘했
다. 하루는 미술시간에 미술 선생님이 앙드레 김의 그림을 보고『이 그림은 독창적이고 창
의적이다. 굉장하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의
칭찬에 앙드레 김은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탤런트 崔佛岩씨는 老役(노역)을 소화해 내는 데는 단연 으뜸이다. 그가 老役을 전문적으
로 맡기 시작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은사인 이광래 교수의 한마디 때문이다.
그 한마디에 그는 연출자 지망생에서 연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 시절 연기보다
는 연출을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연기자의 조건은 지금과는 달라서 신성일처럼 잘생겨야
만 했다. 하루는 「어느 하늘빛」이라는 창작극의 연출을 맡아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극중
할아버지 배역을 맡은 친구의 연기가 영 엉망이었다고 한다. 연출을 하고 있던 崔佛岩씨
가 연기 시범을 보였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이광래 교수는 『아예 네가 연기도 하고 연출
도 해라』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그는 연출자 崔佛岩이 아닌 연기자 崔佛岩이 된 것이
다.
KBS 성우 裵漢星씨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다. 그는 영화를 즐겨보고 영화에 서 본 장면
을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흉내내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미 영화배우로 불릴 정도
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그런 그의 재능도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없었다면 계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울 고명중학교 2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전시균 선생님이 「신숙주와
그의 부인」이라는 희곡으로 연극을 한번 해보자고 했다. 배역을 정하는데, 아 이들의 강
력한 추천에 의해 그가 신숙주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 는 것을 보고 난 선생님
은 이렇게 말했다. 『裵漢星은 앞으로 연기 쪽으로 성공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아나운서
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라』 친구들에게도 늘 듣던 말이지만 절대적으로 존중을 하던 선생
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裵漢星씨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는 어렵게 공부를 하면
서도 중학교 국어 선생님의 칭찬이 계기가 되어 일찌감치 진로를 정해 노력 할 수 있었다
고 한다.
李光洙의 충고
숭실대 명예교수 安秉煜 교수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春園 (춘원) 李光洙
(이광수) 선생이라고 한다. 평양공립고등 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安秉煜 교수는 춘
원의 「무정」,「흙」을 읽고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는 춘원에게 「나라를 빼앗
긴 일제 암흑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묻는 편지 한 장을 보
냈다. 얼마 후 춘원 선생이 회답을 보내왔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당신 자신이 훌륭한 스승의 말을 배워서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이 우리나 라를 위한 올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춘원의 한마디는 安秉煜 교수가 뜻을 세우고 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
었다.
동시통역사이며 한국외대 교수인 崔楨禾(최정화)씨는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의 한마
디」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곧바로 다니카 셀레스코비치 선생이 떠올랐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제3대학 유학 시절, 그는 고비 때마다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의 말 한마디가 인생의
등불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崔교수는 모든 것이 미흡하다는 생각 때
문에 논문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때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너의 논문은 이
미 무르익어 발표해도 괜찮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끝맺음을 할 줄 알아 야 한다』는 말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박사학위란게 운전면허와 같아서 처음부터 완벽한 주
행 실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과 함께 해준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은 그는
무사히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韓佛 頂上(정상)회담 전담통역사가 되었는
데, 그 때문에 그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속상해 하는 것을 안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그 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큼 네가 성공했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항상 의연하게 묵묵히 길을 가라. 진실은 시간
이 가면 밝혀진다.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아라』하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성공
한 후 바쁜 일정 속에 보내는 그를 보고 『시간이 없을수록 사람을 만나는데 힘써라』 하
고 충고를 해준 셀레스코비치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崔楨禾 교수의 오늘이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방송인 李相璧(이상벽)씨는 서울 숭문고등학교 시절 서기원 교장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
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
상담을 직접 하신 서기원 선생님은 그가 정치외교학과에 지망한다고 하자 만류하면서 충
고를 해주었다. 『이상을 좇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당시는 권력중심 사회요, 소위 빽
지향적인 사회라 「정치인이 이상인 시대 」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에게 학연도 없고 혈
연도 전혀 없고, 더군다나 집안의 장남으로 형제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니 안정적인 직업
인이 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미술을 잘하니 실용적인 산업미술학과를 가라고 권
해주었다. 결국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해 합격했고, 미술공부를 하면서 길러진 정서적인 사
고는 졸업 후 기자생활과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프로 바둑기사 曺薰鉉(조훈현·48)씨가 일본인 스승 세고에를 만난 것은 열 살 때였다. 그
에게 입문하기 위해 갔을 때 세고에 선생은 76세였는데, 그 때까지 중국인과 일본인 제자
단 두 명만 길러냈던 분이었다. 세고에 선생은 曺씨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바둑이 중
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유래를 말하고는 『한국에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내가 너를 키워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바둑과 제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직
접 표현하지 않는 세고에 선생으로서는 최대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세고에 선생
은 기자들이 曺薰鉉에 대해 물으면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세고에 선생은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었
다. 장관이든, 기업인이든, 공무원이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언제
나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어릴 적 스승의 언행일치를 보고 배운 曺薰鉉씨는 스
승의 말과 정신을 깊이 새겨 훗날 자신이 제자를 기를 때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延萬熙(연만희·71) 柳韓재단 이사장은 故 柳一韓(유일한) 박사를 그의 스승처럼 생각한
다. 유일한 박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기업 철학에 고스란히 배어 있어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柳韓재단은 정직을 영원한 전통으로 삼아야 한다. 기
업이란 무엇보다 국민의 신임을 얻는 것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柳一韓 박사는 이런 기업철학을 스스로 실천해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에 대
한 孝와 사랑을 기업철학의 바탕에 두고 실천하신 柳一韓 박사의 행동은, 延萬熙씨에게 많
은 영향을 주었고, 그가 영원한 「柳韓人」으로 살아가는데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개그맨 전유성(52)은 메모광이다. 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메모 습관에서 나온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던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중등부 담임 선생님은 메모 습관
이 대단했는데, 자신이 읽은 책의 줄거리, 등장인물 등을 꼼꼼히 정리를 해 파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유성이 너도 꼭 이런 스크랩북을 하나 만들어라. 꼭 해봐라.』
하고 말했다. 당시 전유성은 선생님의 그 말을 그냥 생각만 할 뿐 실천하지는 않았고, 대학
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생님의 말을 실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의 메모들은 책
을 읽다 발견한 「명문장」을 비롯해 세세한 내용들이 모여져 있어 「말로 먹고사는」 그
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宗씨를 있게 한 칭찬 한마디이다. 全北 남원 송정초등 학교 4학년 때 정문자 선생님은 그
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해 준 분이었다. 미술시간에 金炳宗씨의 그림을 지켜본 선생님이 해
준 그 말은 단순히 칭찬을 받았다는 기쁨 그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의 진로
를 결정하기 위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金炳宗씨에게 정문자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한
줄기 빛처럼 강하게 삶의 좌표가 되었다. 당시 조언자가 없는 시골에서 예술 분야를 강력
히 추천해준 선생님의 안목과 사랑은 서울대 美大(미대) 교수가 된 지금까지 정신적 자신
감을 불어 넣었다고 한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 등에서 노래, 연극, 그림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는 고양공립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노래 , 연극 등에서 재능을 발휘했
다. 하루는 미술시간에 미술 선생님이 앙드레 김의 그림을 보고『이 그림은 독창적이고 창
의적이다. 굉장하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의
칭찬에 앙드레 김은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탤런트 崔佛岩씨는 老役(노역)을 소화해 내는 데는 단연 으뜸이다. 그가 老役을 전문적으
로 맡기 시작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은사인 이광래 교수의 한마디 때문이다.
그 한마디에 그는 연출자 지망생에서 연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 시절 연기보다
는 연출을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연기자의 조건은 지금과는 달라서 신성일처럼 잘생겨야
만 했다. 하루는 「어느 하늘빛」이라는 창작극의 연출을 맡아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극중
할아버지 배역을 맡은 친구의 연기가 영 엉망이었다고 한다. 연출을 하고 있던 崔佛岩씨
가 연기 시범을 보였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이광래 교수는 『아예 네가 연기도 하고 연출
도 해라』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그는 연출자 崔佛岩이 아닌 연기자 崔佛岩이 된 것이
다.
KBS 성우 裵漢星씨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다. 그는 영화를 즐겨보고 영화에 서 본 장면
을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흉내내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미 영화배우로 불릴 정도
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그런 그의 재능도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없었다면 계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울 고명중학교 2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전시균 선생님이 「신숙주와
그의 부인」이라는 희곡으로 연극을 한번 해보자고 했다. 배역을 정하는데, 아 이들의 강
력한 추천에 의해 그가 신숙주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 는 것을 보고 난 선생님
은 이렇게 말했다. 『裵漢星은 앞으로 연기 쪽으로 성공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아나운서
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라』 친구들에게도 늘 듣던 말이지만 절대적으로 존중을 하던 선생
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裵漢星씨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는 어렵게 공부를 하면
서도 중학교 국어 선생님의 칭찬이 계기가 되어 일찌감치 진로를 정해 노력 할 수 있었다
고 한다.
李光洙의 충고
숭실대 명예교수 安秉煜 교수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春園 (춘원) 李光洙
(이광수) 선생이라고 한다. 평양공립고등 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安秉煜 교수는 춘
원의 「무정」,「흙」을 읽고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는 춘원에게 「나라를 빼앗
긴 일제 암흑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묻는 편지 한 장을 보
냈다. 얼마 후 춘원 선생이 회답을 보내왔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당신 자신이 훌륭한 스승의 말을 배워서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이 우리나 라를 위한 올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춘원의 한마디는 安秉煜 교수가 뜻을 세우고 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
었다.
동시통역사이며 한국외대 교수인 崔楨禾(최정화)씨는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의 한마
디」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곧바로 다니카 셀레스코비치 선생이 떠올랐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제3대학 유학 시절, 그는 고비 때마다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의 말 한마디가 인생의
등불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崔교수는 모든 것이 미흡하다는 생각 때
문에 논문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때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너의 논문은 이
미 무르익어 발표해도 괜찮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끝맺음을 할 줄 알아 야 한다』는 말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박사학위란게 운전면허와 같아서 처음부터 완벽한 주
행 실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과 함께 해준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은 그는
무사히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韓佛 頂上(정상)회담 전담통역사가 되었는
데, 그 때문에 그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속상해 하는 것을 안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그 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큼 네가 성공했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항상 의연하게 묵묵히 길을 가라. 진실은 시간
이 가면 밝혀진다.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아라』하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성공
한 후 바쁜 일정 속에 보내는 그를 보고 『시간이 없을수록 사람을 만나는데 힘써라』 하
고 충고를 해준 셀레스코비치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崔楨禾 교수의 오늘이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방송인 李相璧(이상벽)씨는 서울 숭문고등학교 시절 서기원 교장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
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
상담을 직접 하신 서기원 선생님은 그가 정치외교학과에 지망한다고 하자 만류하면서 충
고를 해주었다. 『이상을 좇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당시는 권력중심 사회요, 소위 빽
지향적인 사회라 「정치인이 이상인 시대 」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에게 학연도 없고 혈
연도 전혀 없고, 더군다나 집안의 장남으로 형제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니 안정적인 직업
인이 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미술을 잘하니 실용적인 산업미술학과를 가라고 권
해주었다. 결국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해 합격했고, 미술공부를 하면서 길러진 정서적인 사
고는 졸업 후 기자생활과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프로 바둑기사 曺薰鉉(조훈현·48)씨가 일본인 스승 세고에를 만난 것은 열 살 때였다. 그
에게 입문하기 위해 갔을 때 세고에 선생은 76세였는데, 그 때까지 중국인과 일본인 제자
단 두 명만 길러냈던 분이었다. 세고에 선생은 曺씨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바둑이 중
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유래를 말하고는 『한국에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내가 너를 키워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바둑과 제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직
접 표현하지 않는 세고에 선생으로서는 최대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세고에 선생
은 기자들이 曺薰鉉에 대해 물으면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세고에 선생은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었
다. 장관이든, 기업인이든, 공무원이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언제
나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어릴 적 스승의 언행일치를 보고 배운 曺薰鉉씨는 스
승의 말과 정신을 깊이 새겨 훗날 자신이 제자를 기를 때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延萬熙(연만희·71) 柳韓재단 이사장은 故 柳一韓(유일한) 박사를 그의 스승처럼 생각한
다. 유일한 박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기업 철학에 고스란히 배어 있어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柳韓재단은 정직을 영원한 전통으로 삼아야 한다. 기
업이란 무엇보다 국민의 신임을 얻는 것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柳一韓 박사는 이런 기업철학을 스스로 실천해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에 대
한 孝와 사랑을 기업철학의 바탕에 두고 실천하신 柳一韓 박사의 행동은, 延萬熙씨에게 많
은 영향을 주었고, 그가 영원한 「柳韓人」으로 살아가는데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개그맨 전유성(52)은 메모광이다. 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메모 습관에서 나온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던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중등부 담임 선생님은 메모 습관
이 대단했는데, 자신이 읽은 책의 줄거리, 등장인물 등을 꼼꼼히 정리를 해 파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유성이 너도 꼭 이런 스크랩북을 하나 만들어라. 꼭 해봐라.』
하고 말했다. 당시 전유성은 선생님의 그 말을 그냥 생각만 할 뿐 실천하지는 않았고, 대학
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생님의 말을 실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의 메모들은 책
을 읽다 발견한 「명문장」을 비롯해 세세한 내용들이 모여져 있어 「말로 먹고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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